전통한과란?

한과의 유래

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과자를 가리켜 과정류(菓釘類) 또는 우리말로 과줄이라고 한다. 본래는 생과(生果)와 비교해서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과일의 대용품이라는 뜻에서 조과(造菓)라고 하였다. 초기에는 중국 한대에 들어왔다 하여 한과(漢菓)라고도 불리다가 외래과자[양과(洋菓)]와 구별하기 위해 한과(韓菓)로 부르게 되었다.
한편, 과(果)란 말은 <삼국유사(三國遺事)>의 가락국기(駕洛國記) 수로왕조(首露王條)에 처음 나오는데, 수로왕묘 제수에 과(果)가 쓰였음이 기록되어 있다. 제수(祭需)로 쓰는 과(果)는 본래 자연의 과일인데,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일의 형태를 만들고, 여기에 과수(果樹)의 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다고 한다.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, <성호사설(星湖僿說), 1763년>에 조과가 제수로 쓰이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.

한과의 역사

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
<삼국유사>의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과(果)가 제수로서 처음 나오고 신문왕 3년(683) 왕비를 맞이할 때 폐백품목으로 쌀, 술, 장, 꿀, 기름, 메주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쌀, 꿀, 기름 등 과정류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으므로 이미 한과류를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. 또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차 마시는 풍습이 성행하면서 진다례, 다정모임 등의 의식에 따른 다과상이 발달하였고, 과정류가 차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시대에 한과가 만들어졌음을 짐작케 한다.
고려시대
유밀과는 국가의 불교적 대행사인 연등회연 · 팔관회연뿐만 아니라 공사연회(公私宴會) 제사에 필수 음식이었고, 왕공(王公) · 귀족 · 사원의 행사에 반드시 고임상으로 올려졌다. 또한 <오주연문장전산고>에 충렬왕 22년(1296) 원나라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 기 위하여 원나라에 간 왕이 결혼식 연회에 본국에서 가져간 유밀과를 차려 그 곳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유밀과가 국외까지 전파되었음과 고려에서는 납폐음식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. 이로부터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유밀과를 '고려병(高麗餠)'이라 하였으며 고려병을 '약과(藥菓)'라고 부르며 즐겨 찾게 되었다.
<고려사>에 의하면 명종 22년(1192)에는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고 유밀과 대신 나무열매를 쓰라고 하였으며, 공민왕 2년(1353)에도 유밀과의 사용금지령을 내렸음을 미루어 볼 때 이 시기에 유밀과가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.고려시대에는 유밀과뿐만 아니라 다식(茶食)도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. 다식은 국가적 규모의 대연회에 쓰였으나 유밀과처럼 일반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.
조선시대
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이어 과정류가 한국인의 의례식품 · 기호식품으로 숭상되었으며 왕실, 반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하여 세찬(歲饌)이나 제품(祭品), 각종 연회상에는 빠질 수 없었던 행사식으로 쓰였다. 그중에서도 특히 유밀과나 강정 같은 과자는 민가까지도 널리 유행하였으며 주로 설날음식이나 혼례, 회갑, 제사음식으로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. 이처럼 과정류가 성행하자 이 시대에도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. 조선왕조의 종합 법전으로 일컬어지는 <대전회통(大典會通)>에 이르기를 "헌수, 혼인, 제향 이외에 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한다"고 하였다.
현대의 과자
1900년대 서구의 식생활 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 고유의 전통 한과는 서양과자에 밀려 그 설 자리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. 밀가루 · 설탕 · 유제품을 재료로 해서 만든 과자류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진 반면 전통 과정류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 때문에 상대적으로 점차 그 기호도를 잃어가게 되었다. 최근에는 의례가 간소화되긴 하였지만 명절, 제사, 혼인, 경사스런 날의 선물로써 한과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.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과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 한과에 대한 관심 또한 확산되고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.